[김성주 더봄] 잘 가라 철새야, 너희의 집과 우리의 마음을 지킬게
- sungzu

- 3월 2일
- 4분 분량
[김성주의 에코테인먼트]
서식지 보전의 손길로 이웃 활주로 닦기
철새 환송하며 우리에게 건넨 봄의 약속
갯벌과 숲처럼 아픈 영혼 보듬는 환경
겨울의 막바지다. 이제 북녘으로 돌아갈 철새를 배웅하러 갔다. 철원의 이길리 탐조대에 가면 요즘 두루미와 큰고니와 기러기들이 한창 살찌우기 중이다. 러시아까지 날아가야 하니 일단 먹어야 한다. 운동도 하고 깃털도 가다듬는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여기서 짝을 찾아야 한다.
소개팅을 준비하는지 외모 관리가 한창이다. 4월에 떠날 예정인 큰고니와 원앙은 지금부터 무척 화려해진다. 외모지상주의는 새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가진 자와 생긴 자가 지배한다는 어떤 학생의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무리 한쪽을 보니 꼼짝 않고 앉아만 있는 새가 한 마리쯤 있다. 안 먹고 안 움직이고 그냥 있다. 보다 못한 인간이 말을 걸면 딱 이 말이 튀어나온다.
"야 힘내. 다들 준비하잖아."
새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저 지금 에너지가 없어요."

우울증 환자를 보는 시선도 비슷하다. '게으르다' '의지가 약하다' '저러면 못 쓴다'는 식이다. 그런데 실제로 들여다보면 오히려 너무 오래 버텨온 사람들이다. 에너지가 바닥난 것이지 의지가 없는 게 아니다.
영국 심리학자 도날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이 이를 오래전에 설명해 놨다. 사람이 회복하려면 '안아주기 환경(Holding Environment)'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대단한 처방이 아니라 그냥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자리다. 쉽게 말하면 갯벌 같은 것이다.
저어새한테 갯벌은 집이다. 그들이 머무는 갯벌의 조수는 매일 예측 가능하게 들고 난다. 갯벌은 저어새한테 "오늘 먹이 찾았어요?" 같은 소리 안 한다. 그냥 거기 있다. 그게 전부다.
우울한 사람한테도 이런 자리가 필요하다.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압박보다 그냥 변함없이 거기 있어주는 것. 치유농장으로 치면 매일 같은 시간에 열리는 문, 같은 자리의 의자, 같은 얼굴의 운영자다.
"어제도 여기 있었고 오늘도 여기 있네." 이 경험이 생각보다 강력하다.

숲은 당신 이력서 안 본다
도널드 위니콧은 또 재미있는 말을 했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대개 '거짓 자기(false self)'로 오래 버텨왔단다. 회사에서 집에서 모든 관계에서 "저 괜찮아요" 연기를 하다가 결국 진짜 자기가 뭔지도 모르게 된 상태가 된다고 하였다. 배우가 너무 오래 캐릭터에 빠진 나머지 본명을 잊어버린 것과 비슷하다.
자연이 여기서 의외의 역할을 한다. 숲은 당신 이력서 안 본다. 텃밭은 어제 당신 성과를 모른다. 새소리는 당신이 우울하다고 볼륨을 낮추지 않는다.
이 무심함이 오히려 치유다. 아무도 안 볼 때 흙 만지작거리고 아무도 평가 안 할 때 꽃 한 송이 오래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아, 나 이런 거 좋아했었지"가 슬며시 올라온다. 오래 잠들어 있던 진짜 자아가 고개를 드는 순간이다.
내가 하는 일 중에는 관광이나 체험프로그램을 컨설팅하는 게 있다. 관광프로그램 운영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빈 시간이다. 뭔가 채워야 할 것 같고 안 채우면 돈 값을 못 하는 것 같아 일정을 꽉꽉 눌러 담는다. 그런데 에너지 없는 사람한테 꽉 찬 일정은 고문이다.
강원도 평창의 치유농장에서 봤다. 참여자가 텃밭 한쪽에 쪼그려 앉아 흙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농장 주인은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옆에 앉았다. 둘 다 한참 흙만 봤다. 나중에 그 참여자가 말했다. "아무도 뭔가 하라고 안 해서, 처음으로 숨 쉰 것 같았어요."
일본 산촌 치유 프로그램은 하루의 30%를 아예 '자유 체류 시간'으로 비워둔다. 낮잠 자도 되고 하늘 봐도 된다. 참여 후기 1위가 항상 "그 시간이 제일 좋았어요"다. 비워야 채워진다. 진부하지만 진짜다.

심리적 청테이프를 떼어내자
그런데 새들의 서식지에서 청테이프나 페트병이 많이 발견된다. 그런 생활 쓰레기는 새들에게 치명적이다. 청테이프를 물었다가 부리에 붙어 버려 굶어 죽는 새가 있다. 길에 떨어진 실오라기 하나가 발가락을 잘라낸다. 죽은 새의 뱃속에는 플라스틱 조각이 가득하다. 인간이 무심코 버린 것들이 새한테는 흉기다.
우울한 사람 주변에도 이런 것들이 있다. 비난 한마디, 비교하는 것, "왜 아직도 그래?"라는 말. 날개 펴려는 사람에게는 새 부리에 딱 붙어 있는 청테이프다. 우리는 그들에게 대단한 도움 말고 그냥 그 청테이프부터 치워야 한다.
농사를 오랫동안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농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좋은 건 실패가 기본값이라서란다. 모종이 죽으면 다시 심지 뭐. 날씨 안 좋으면 좋아질 때가 있겠지 하며 다음을 기다린다. "어긋나도 괜찮아, 다음이 있어"의 반복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단다. 우리는 실수 한 번에도 무너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
도널드 위니콧이 좋은 부모의 조건으로 제시한 게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enough mother)'다. 완벽한 어머니 말고, 그냥 대체로 거기 있고 틀리면 다시 맞춰주는 사람.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핵심이다. 참 다행이다.
갯벌도 완벽하지 않다. 조수가 너무 셀 때도 있고 먹이 없는 날도 있다. 그래도 저어새는 매년 돌아온다. 충분히 좋은 곳이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완벽할 필요가 없다. 완벽보다는 충분히 너그럽고 안전한 자리가 낫다.
날개 접은 새한테 "힘내!"는 소용없다. 그냥 그 옆에 숲처럼 개울처럼 갯벌처럼 조용히 있어주면 된다. 이제 3월이야. 봄바람이 불어온다고.
☞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 1896 ~ 1971)=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로 현대 심리학, 특히 대상관계이론에서 가장 따뜻하고 인간적인 통찰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상관계이론, 발달심리학을 연구했다. 그는 안아주기 환경, 참자기와 거짓자기, 충분히 좋은 부모 등의 이론으로 유명하다.
☞대상관계이론= 정신분석학의 한 갈래로 개인이 타인(대상)과 맺는 관계가 자아 형성과 심리적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이론이다. 도널드 위니콧은 이 분야의 선구자로 아이가 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독립된 자아로 성장하는지 설명하며 '안아주기 환경' 등의 개념을 제시했다.
여성경제신문 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 sungzu@naver.com
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
한양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관광과 엔터테인먼트를 전공했다. 삼성에버랜드에서 오랫동안 '환상의 나라'를 설계하며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현재는 슬로우빌리지 대표이자 컨설턴트로 변신해 농촌에 행복의 마법을 부리는 중이다. 한국수달보호협회 수도권서부지회장으로서 생태 보호에 앞장서고 있으며, 한국사회적농업협회 부회장을 맡아 치유농업과 6차산업을 이끌고 있다. 사람과 생명이 함께 웃고, 모든 이가 즐거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쾌한 사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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