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옆 국수집] 영주시 장수 조이월드와 쫄면
장수 조이월드
영주의 장수면은 말 그대로 오래 산다는 장수(長壽)라는 단어를 쓰는 면이다. 장수 사람들을 만나 보면 오래 오래 사는 사람들의 특징인 느긋함과 낙천적인 성격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좋다.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지만 영주를 가게 되면 톨게이트에서 일부러 장수면을 지나려 길을 돌리곤 한다.
장수면을 일부러 들르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꽃계마을이라 불리는 화기리 마을과 장수 조이월드를 가기 위해서이다.
우선 꽃계 마을을 소개하자면 조선 시대 명장인 장말손 장군의 고택이 있는 농촌 마을이다. 쌀과 잡곡을 하면서 생강을 많이 심는 곳이다. 영주 생강은 전북 완주의 봉동 생강과 함께 생강 중에 명물로 친다.
안동 장씨 장말손 장군은 조선 전기의 무관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다. 그 후손이 영주시 장수면에 자리잡아 지금껏 살아 오고 있다. 장말손 고택은 경북 지역의 전형적인 한옥 형태를 갖추었는데 지금 가 보면 손주들의 장난감과 플라스틱 미끄럼틀이 마루 위에 놓여져 있어 정겹다. 종가다운 모습이다. 어린 후손들이 행복한 집이니 언제나 행복한 곳이리라.
꽃계마을을 넘어 들판으로 가면 장수 조이월드가 있다. 40년을 넘게 영업을 해 온 전통의 놀이공원이다. 옛날 영주시는 인구가 40만명을 넘겼다던데 그 당시 사람들의 여가를 책임져 준 공원이다. 파3 골프장과 놀이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한 테마는 없는 어뮤즈먼트 파크이다. 유원지업으로 등록되어 있고 관광농원으로도 지정받았다. 관광농원은 88올림픽 때 외국인 관광객이 농촌으로 유치하기 위해서 만든 사업이다. 전국에 200개 정도가 있는데 대부분 영업이 신통치 않다.
처음 가던 날. 가을이었다. 화기리 이장을 지냈던 분이 안내를 해 주어 장수 조이월드를 걷고 있으니 매점 같은 건물 안에서 할머니가 나온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나이가 있는 중년 둘이 공원 안을 어슬렁거리니 손님으로는 안 보였나 보다. 나는 동종업계 분이라 반가워서 자기 소개를 장황하게 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많이 오냐고 오냐고 물었더니 주말에는 학생들이 제법 온다고 한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놀이기구들이 작은 마당 안에 빼곡이 배치되어 있다. 바이킹, 눈썰매, 수영장, 범퍼카, 회전그네, 레이스카, 슈퍼드레곤, 회전목마, 싱싱보트 정도가 있다. 바이킹의 용머리를 보니 인상적이다. 무언가 절규하는 표정을 지닌 용머리이다. 처연하다. 일부러 저렇게는 못 만든다. 페인트를 덧씌워 도색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주말에는 공원으로 사람들이 놀러 온다. 매점 위의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 나오고 회전 목마가 돈다. 그리고 바이킹을 탄 이들의 비명과 환호 소리가 울린다. 범퍼카를 탄 아이는 연신 핸들을 꺽고 패달을 밟으며 앞 차의 뒤통수를 들이 받으려 노력한다. 살아 있다. 서울의 용마랜드는 장수 조이월드와 크기는 비슷하지만 영업을 하지 않는 죽은 공원이지만 여기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레트로가 뿜는 곳이다.
장수 조이월드는 전설적인 놀이 공원이다. 오랜 세월 문을 닫지 않고 영업을 하고 있는 노부부에게 경의를 표한다.
영주 IC에서 멀지 않다. 중앙 고속도로가 영주시 장수면을 관통해 지나가니 톨게이트를 나와서 조금만 가면 장수 조이월드를 만날 수 있다.
중앙 분식과 나드리 분식의 쫄면
영주가 왜 쫄면이 명물이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영주 사람들은 시내의 분식집에서 쫄면을 먹는 것이 그냥 생활이었으니 모르고, 외지 사람들은 많고 많은 면 중에 하필 쫄면이 명맥을 이어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쫄면이 특별한 맛이 있어서 명물이 되었다기 보다는 쫄면집이 오랫동안 살아 남았기에 명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쫄면 집 사람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영주 사람들의 쫄면 사랑은 남다르다. 평상시에 먹고 명절에도 먹는다.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들은 학생 시절을 추억하는 음식이고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따라 먹는 음식이다.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이들이 고향으로 오면 일부러 시내에 가서 쫄면을 포장해서 집에 가서 먹는단다. 영주 사람들은 쫄면을 참 좋아한다.
영주에서 가장 유명한 쫄면 집은 중앙 분식과 나드리 분식이다. 두 가게가 쌍벽을 이룬다. 중앙 분식은 옛 모습 그대로 갖추고 분점도 안내고 전통을 이어 나간다. 심지어 홈페이지도 없다. 반면 나드리 분식은 밖으로 진출해 서울에 분점도 내고 밀키트도 출시했다. 외식 프랜차이즈 쪽에서는 꽤 유명하다.
나드리 분식은 지금 사장의 할머니가 6.25 전쟁 시에 월남하여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조그맣게 국수집을 창업하고, 이후에 며느리 김정애 사장이 가게를 이어 영주에서 1986년에 나드리 분점이라는 이름으로 개점하였다고 소개된다. 2층에 자리잡은 식당은 쫄면 외에도 돈까스, 만두, 우동을 판다. 쫄면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나드리 분식은 중소기업벤처부로부터 100년 가게로 지정받았다.
중앙 분식은 밖으로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영주시의 백년 가게로 지정 받을만도 한데 받지 않았다. 일부러 안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 그 흔한 홈페이지조차 없으니 말이다. 메뉴도 딱 2개다. 쫄면과 간장 쫄면. 간장 쫄면은 매운 쫄면 대신 나온 듯 하다. 특이한 건 곱빼기도 있는데 매장에서는 먹을 수 있는데 포장은 안 된다. 가게 오픈 시간은 12시이다. 11시 55분에 들어갔더니 나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가게이다.
나도 쫄면을 좋아한다. 나는 쫄면을 어른의 음식으로 기억한다. 쫄면을 처음 접했던 것은 1980년 1월이다. 서울 청량리 맘모스 백화점 지하 식당 코너로 성당 수녀님이 분식을 사주신다고 나와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셨다. 미사 때 복사를 하는 아이들이 수고한다고 한 턱 쏘신거다. 벽의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하는데 다들 라면이나 떡볶이, 순대를 시키는데 나는 왜그랬는지 쫄면을 시켰다. 그전에는 한번도 먹어 본 적이 없지만 쫄면은 무척 맵고 질기다는 소리는 들어서 시킨 것이다. 맵고 질기다는 것은 아이들이 못 먹는 어른의 음식이라는 뜻이다. 당시에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아이들 중에는 제일 높은 학년이었다. 그래서 난 너희들과 다르게 조금은 어른스럽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그랬던 것 같다.
쫄면 그릇을 받아 들었다. 역시나 쫄면은 매웠다. 너무나 매웠다. 면발은 내 이빨로는 끊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혀는 타들어 가고 씹히지 않는 면은 수십번을 씹어 끊어 뱃속으로 넣었다. 결국 다 못 먹고 남겼다. 너무나 괴로웠다. 그런데 수녀님이 칭찬을 하신다. 쫄면이 그렇게 맵다는데 시몬은 참 잘 먹는구나. 시몬은 내 세례명이다. 수녀님도 매울까봐 못 드셔봤단다. 이후로 나는 쫄면을 먹은 이야기를 몇 달 동안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몇 달 후 수녀님이 다시 한번 맘모스 백화점 지하로 우리를 데리고 가셨는데 결국 나는 쫄면을 성공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낀 날이 쫄면을 비운 날이다.
당시를 회상하면 백화점 지하 식당 코너는 사방이 펑펑 뚫려 있는 모습이었다. 시장의 좌판이 건물 안으로 들어 가서 그랬다. 지금의 푸드 코트는 그 모습이 조금 발전한 것이다. 인테리어가 투박했다. 직사각형의 매장은 한명은 오픈된 주방이 있고 나머지 삼면은 ㄷ자의 바로 구성되어 사람들이 의자를 놓고 둘러 앉았다. 당시에는 스탠드바 형태라고 불리었다. 신림동의 순대 타운 가게가 그런 모습을 아직도 갖고 있고, 많은 시장 안의 지하 상가 음식점들이 一 자이거나 ㄷ자의 모습이다.
쫄면은 70년대 후반 인천의 국수 공장에서 실수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다. 반죽을 잘못해 질기고 굵은 면이 만들어졌다는 탄생의 스토리는 어느 공장에서 먼저 만들어졌는지 설들이 분분하지만 덕분에 질긴 비빔국수를 내놓는 분식집들이 하나 둘씩 새로 생겼다. 면발이 쫄깃하니까 이름도 쫄면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쫄면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지금 쫄면 원조집이라고 불리는 가게들은 모두 당시에 쫄면을 메뉴판에 올렸던 집들이다. 쫄면을 처음 만든 집은 아니다. 어쨌든 쫄면을 의도하든 실수로 만들었든 처음 만드신 분은 존경받아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질기고 매운 국수 요리를 만드셨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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